채만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부소장)
온 세상이 떠들썩 하듯이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맞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어떤 전망을 가지고? 혹은, 그것은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 --- 탈(脫)산업사회? 정보화 사회? 지식기반 사회?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
그렇다.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물어봐야 한다. 그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인가? 그것은 착취와 억압이 없는 사회인가? 그것은 이윤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사회인가? 그것은 모든 인간이 그 타고난 재능과 지질을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인가?
그렇다.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리고 당분간은 아니다.
왜? ---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인민 대중이 아직 그러한 사회를 건설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은 당당한 혁명적 투쟁과 실제로 혁명으로, 말하자면 영광으로, 20세기를 열었으나, 대체로 그 혁명의 성과를 보위·발전시키고 영구화하지 못하고, 오늘날 깊은 회한과 방황, 그리고 모색 속에서 한 세기를 마감하고 있다.
무엇이 노동자들의 전진을 가로막았는가? 무엇 때문에 20세기의 노동자 계급은 그들의 혁명을 보존하여 확대시키지 못하고 좌절했는가?
그 원인은 숫적으로 다수이고, 구조적으로 복잡하다. 어떤 요인은 노동운동 혹은 노동자 정치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고, 어떤 것들은 그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단지 소수의, 그러나 본질적인, 요인들이나 원인에 대해서만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II
가장 중요한 객관적 요인의 하나는, 말할 나위도 없이, 제국주의의 포위와 공격, 그리고 파괴공작이다.
막 태어난 혁명을 좌절시키려던, 10월혁명 초기의 간섭전쟁은 그만두더라도, 제국주의와 그 동맹자들은 소련, 동유럽, 그리고 기타 국가에서의 사회주의를 분쇄하기 위해서 그들 지역을 철통처럼 봉쇄하고, 끊임없이 내부로부터의 파괴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거꾸로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을 '철의 장막'이라고 중상하고, 자신들의 파괴공작과 같은 야비한 정치적·군사적 술책을 '공산당식, 빨갱이식 수법'이라고 모략하였다.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러한 모략선전에 침윤당한 일부의 자임 공산주의자들은 독점자본의 그러한 야비한 수법을 '혁명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으로 착각하여 수용하고, 그리하여 결과적·객관적으로 저들의 악선전을 도와주는 과오를 범하였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자칭 '진짜 국제주의' 공산주의자들은 그러한 악선전에 적극 동참하기도 하였다. --- 우리는 당연히 이러한 잘못된 경향과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봉쇄와 파괴공작은, 사회주의의 물질적 전제이자 기반으로서의 고도 생산력의 미성숙과 더불어, 사회주의 체제에 일정한 역기능을 강요하였고, 그것이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의 대중의 자발적 헌신을 좀먹어 갔다. 고도 자본주의의 외견상의 화려함과 풍요도, 한번도 그러한 상업적 현란함과 그에 가려진 대중의 빈곤을 경험해 보지 못한 20세기 말엽 소련 및 동유럽의 젊은 세대에게는 강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는 이러한 상황은 결코 다시 조성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혁명이 틀림없이 다름 아닌,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극에 달해 있는, 제국주의 국가들 자체 내에서의 문제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혁명적 정치 결사와 혁명을 예방하고 압살하기 위해서 제국주의와 그 하수인들은 세계 도처에서 실로 수백만 명의 노동자·활동가·혁명가들을 고문하고 학살하였다.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선양한다는 대의 하에 말이다!
다른 한편, 급격한 생산력 발전과, 냉전이라는 상황하에서 노동운동과 노동자 정치를 자극하지 않고 거세시키려는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고려는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노동자들이 약간 증대된 실질임금뿐만 아니라 약간의 안락한 사회보장을 누릴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실제로 노동자 대중의 혁명정신을 좀먹는 데에 기여하였다.
노골적인 변절자들은 차치하고도, 자본주의 선진국의 많은 노동운동 및 노동자 정당 지도자들이 이러한 살인적인 폭력의 위협과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의 번지르르한 수사(修辭)에 사실상 굴복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10월혁명의 성과로 탄생한 러시아의 노동자 국가를 타자(他者)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에 적대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민주적 사회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 혹은 '인간을 얼굴을 한 사회주의', 혹은 '부드러운 사회주의', 혹은 '새로운 사회주의' 등등과 같은, 무언가 본래적인 혹은 전통적인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다른 '사회주의'에 몰입해 갔다. 그들은 극히 협소하게 허용된 물질적 안락함과 공산주의의 이른바 비인간적 성격에서 그들의 논거를 찾았다. 하지만, 전자는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그 자체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제약된 극히 조악한 것이었고, 제국주의적 착취와 수탈에 의해 지지된 것이었다. 후자는 물론 자본가적 악선전에 의해서 형성된 허위 이데올로기였다. 아무튼 그 새로운 노선이 그들 지도자들에게 물질적 정치적 안락함을 보장하는 길이기도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바로 여기에 20세기 노동운동, 노동자 정치의 진정한 문제, 그리고 21세기를 향한 과제가 있다.
III
20세기 노동운동 혹은 노동자 정치의 핵심 문제는 이른바 '사회민주주의' 혹은 다른 말로 '시민주의'인데, 그것은 노동운동 혹은 노동자 정치의 거세이고 독점자본에의 노동자 계급의 본의 아닌 동의 혹은 굴종이다.
당연히 21세기를 향한 노동자 계급의 핵심적 과제는 그러한 묵종 혹은 굴종을 청산하는 것이고, 사회민주주의 즉 시민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노동운동과 노동자 정치에서의 피상적이고 속류적이지 않은 진정한 과학과 근본주의를 회복하는 것이다.
미국을 예로 들자면, 미국의 노총인 노동총동맹-산업별회의(AFL-CIO)는 지난 10월의 대의원대회에서 내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엘 고어를 지지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는 매 선거마다 민주당 후보를 지지해오던 '관행'에 따른 것이다. 비단 AFL-CIO만이 아니다. 심지어 미국의 공산당마저 선거에서 대체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해 왔다. 그들의 변명은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래도 노동자 계급에 약간은 호의적인 민주당을 차선(次善) 혹은 차악(次惡)으로서 지지한다는 것이다. --- 이러한 태도야말로 21세기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즉각 청산하지 않으면 안되는 정치적 무기력이자 극도의 편의주의이다. 노동자 계급의 자신의 독자적이고 변혁지향적인 정치노선을 진지하게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각종의 사민주의적 프로그램들도 청산되어야 한다.
예컨대, 노동자 경영참가라고 하는 환상은 청산되어야 한다. 노동운동 내부의 많은 사민주의적 분자들은 독일에서의 노동자 경영참가제도를 모범적인 예로서 찬양한다. 회사의 주요 경영방침을 노사 동수의 협의회에서 결정한다고. 하지만, 그 평의회의 의장은 추가적 성원이고 언제나 자본 측에서 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들 찬양자들은 침묵하고 싶어 한다. 추가적인 성원으로서의 의장이 언제나 자본 측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노사간의 경시할 수 없는 이해의 충돌을 대표하는 모든 정책이 모두 자본 측에 유리하게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들의 의견과 의지가 반영되는 곳은 노자 간의 이해대립이 없거나 있더라도 무시할 수 있는 곳뿐임을 이는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이른바 모범적이라는 독일식 제도는 노동자들을 체제 내로 포섭하기 위한 기만적 기구에 불과하다.
그런데, 경영자란 무엇인가? 자기증식하는 가치물로서의 자본의 인격화에 불과하다. 즉 자본가이고, 경영이란 착취의 관리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이른바 노동자 경영참가란 노동자들 자신이 자신의 잉여노동 착취에 참가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착취의 증대에 복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명백히 모순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이해에 극히 성반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민주의적 프로젝트로서의 이른바 '종업원 지주제'니 '우리사주제'니 '국민주 제도'니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로 노동자 계급도 인민에게 유해하다. 이들 제도는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무력화시키고 자본의 착취를 강화하는 장치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노동자들에게 자주 심각한 위협으로 된다. 이 제도를 통해서 노동자·인민은 주식시장의 투기에 휘말려들게 되고, 거기에서 노동력 재생산비의 일부를 이루는 가계준비금을 탕진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제도는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이 '이윤의 분배'에 참가하고 있다는 환상을 불어 넣는다. 그러나 그러한 착각은 그 이윤이란 것이 결국은 자신들로부터 착출된 잉여가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몰지각한 데에 기초하는 것이고, 나아가 그러한 몰지각을 더욱 심화시킨다. 더구나, 그들에게 지불되는 '배당금'은 사실은 그들의 임금의 일부가 위장된 형태로 지불되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무산자로서의 임금노동자의 끊임없는 (확대)재생산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 '종업원 주주' 등에게 돌아가는 '배당금'이 그들을 독립적 소생산자 혹은 자본가로 탈노동자화시켜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의회주의 또한 청산되어야 할 사민주의적 주요 프로그램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의정치'라는 이름 하에 노동자·민중의 실질적 행동을 정치적 영역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근대 부르조아 민주주의에서는 노동자·민중은 극히 형식적인 투표권 이외의 어떤 실질적 참정권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독점자본의 과두정치여서, 극소수의 거대 자산가들과 그들의 괴뢰만이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독점자본의 다른 얼굴로서의 사민주의는 의회주의에 집착하는데, 거기에서 그들은 노동자들을 권력장악을 위한 종파적 투쟁의 도구로 동원한다.
이외에도 노동자 계급이 여러 형태의 사민주의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들이 많이 있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사민주의는 노동운동 및 노동자 정치운동에서의 국가주의의 강력한 지지자이다.
사민주의는 노동운동에서의 경쟁력 이데올로기의 고취자이다.
사민주의는 노동운동 및 노동자 정치운동에서의 몰과학적 편의주의의 창도자이다.
최근 사민주의는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라는 이름 하에 아예 노골적으로 신자유주의 진영으로 달려 갔다.
등등.
IV
그리하여, 서유럽에서 사민주의적 정치·노조 지도자들에 의해서 이끌려 온 것처럼, 그리고 신흥공업국에서 그들의 은밀한 추종자들에 의해서 이끌려 온 것처럼, 노동운동이 사민주의가 조성한 환상을 좇는 한, 거기에는 21세기의 미래가 있을 수 없다. 오직 20세기의 연장으로서의 21세기만이 있을 뿐이다.
사민주의를 청산하고 노동자 계급의 강고한 독자적 노선을 구축(構築)하는 것, 혹은 노동운동 및 노동자 정치의 근본주의를 회복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해방의 시대로서의 21세기로 가는 노동자 계급의 긴급하고도 본질적인 과제이다.
마지막으로 말하자면, 노동자 계급의 규율 있는 전위정당의 건설은 노동자 계급이 그러한 과제를 수행하는 구체적 경로이자 형태이다. 우리는 사민주의자들 및 기회주의자들이 정력적으로 선전하는 무규율하고 무정형한 '대중정당'·선거정당을 배격해야 한다. 전위정당 자체야말로 가장 훌륭하고 진정한 대중정당이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무규율한 정당에는 노동자 계급의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독점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격과 과학기술혁명의 급격한 진전에 의한 노동자 계급의 어려움. 이것들은 당장 노동자들의 생활 상에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동시에 노동운동의 발전을 재촉하는 자극제이자, 새로운 사회을 위한 물질적 전제이다.